1997. 10. 24


해외 한국학 진흥과 조선왕조실록 CD-ROM


김   현

서울시스템 이사, 하버드대학교 한국학연구소 방문연구원


  해외 학자들에 의한 한국 문화 연구가 중요성을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 나름의 학문 방법론에 입각한 연구 성과들은 우리들의 시각에서 보는 것과 다른 점이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자국 문화 연구의 지평을 넓혀 주는 새로운 자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한국 연구가 그 사회에서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대학 사회에서 소수의 전문 연구자들이 하는 지역 연구가 얼마나 사회적 영향력이 있을까 회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회의 지적 수준을 이끌어 가는 오피년 리더들이 한국의 문화 수준에 대해 얼마만큼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느냐 하는 것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국제 사회에서의 한국의 위치, 특히 그 경제적인 역량이 얕잡아 볼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사람이 인정하고 있다. 세계 주요 공항 어디를 가나 보게 되는 한국 기업의 광고판. 거기에 쓰인 한국 회사의 이름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나라의 학술과 문화에 대한 그들의 선입견이 경제력에 대한 이미지만큼 좋은 것은 결코 아니다. 아시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미국 학생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일본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우호적임을 알게 되는데, 오늘날 일본 경제의 성공도 그들의 독특하면서도 깊이 있는 문화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반면 한국은 그러한 기반이 없이 무언가 부정한 방법으로 갑작스럽게 돈을 모은 졸부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우리가 자부하는 바와는 정반대의 현상이지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그들 사이에서 일본 문화에 대한 수십 권의 저서가 발간되는 사이에 한국에 대한 책이 겨우 두세 권 나오는 실정이니 그들의 편견은 당연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이 저급한 수준을 맴돌고 있는 한 우리 상품에 대한 인식도 일정한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한국 상품이 해외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잃어 간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안은 품질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라는 처방도 오래 전에 나왔다. 그러나 품질이라는 것은 숫자로 표시되는 가격처럼 객관적인 것이 아니며, 상품 그 자체의 가치로만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자동차나 VTR 등 특정 제품의 인지도를 높이기에 앞서 ”한국“이라는 내셔널 브랜드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 한국이라는 나라와 그 국민들이 ”싸구려“가 아니라는 인식이 전제될 경우에만, 한국의 상품에 대한 인지도도 바뀔 수 있는 것이다. 해외 학술 진흥을 통해 내셔널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는 일은 물론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그 나라 국민의 의식의 근저에서부터 한국의 위상을 확실하게 자리매김하는 길이다.

  해외의 한국학 연구를 활성화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해외 학자들에게 한국학 진흥을 위해 한국에서 도와야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들의 첫 번째 대답은 “재정 지원”이다. 그 중에서도 첫 번째는 한국에 관한 강의를 할 교수들에게 줄 인건비이며, 두 번째는 대학원에서 한국을 전공하겠다고 하는 학생들에게 줄 전액 장학금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한국의 관련 기관에서 이미 그 수요와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으니 필자가 새삼 거론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 재정 지원 문제에 가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들에게는 그 이상 절실한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연구 생산성을 높일 “정보의 공급” 문제이다.

  수십만 권의 장서와 수십 명의 사서를 보유한 서울의 유수의 대학과 이제 겨우 강의동을 건설한 지방 신설 대학을 비교할 경우, 후자에 속한 교수와 학생들이 겪는 정보의 궁핍은 상론할 필요도 없이 자명하다. 지식 사회에서는 획득 가능한 정보의 차이가 곧 그 연구 수준의 차이로 이어진다.  하버드나 옥스포드가 각각 미국이나 영국의 최고의 대학의 하나로 인정되는 것과 거기에 ‘와이드너’나 ‘보들리안’과 같은 구미 대학 최대의 도서관이 있는 것 사이에는 깊은 상관 관계가 있다. 그러나 구미 유수의 대학들이 수백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한국 관계 자료 또한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9만 권의 한국서적을 보유하고 있는 하버드 옌칭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더군다나 여타 대학은 대부분은 한 대학에 한국학 전임 교수가 한 사람 있을까 말까 한 실정이니 인적 유대에 의한 정보 확충도 용이치 않다. 그리고 간과해서는 안될 또 하나의 사실은 학생들의 한국어 언어 능력이다. 서양에서 몇 년씩 유학한 한국인에게 영어나 불어가 여전히 어려운 것처럼, 그들이 설사 한국학을 전공으로 삼고 있다고 해도 한국의 문헌을 우리처럼 자유롭게 섭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한국의 전문가에게도 난해한 책들을 무작정 공급하는 것은 그들의 연구 생산성을 높일 유용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안은 무엇인가?

  하버드 대학 옌칭 도서관의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마주치는 첫 번째 열람용 컴퓨터의 화면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글자들이 떠 있다. 조선왕조실록 CD-ROM을 열람하기 위한 전용 컴퓨터이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역사를 연구하는 교수와 학생들에게는 가히 보물단지와 같은 시설이다. 국어사전과 옥편, 심지어는 한영 사전까지 끼고서 몇 달씩 걸려 읽어야 찾을까 말까 한 자료들을 한 순간에 검색해 주니 교수건 학생이건 그 앞에서 흥분할 수밖에 없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연구 주제를 찾기도 하고, 학위 논문을 쓸 자신감을 얻기도 한다. 이러한 자신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버드 대학의 학생들의 경우, 풀 스칼라십이 주어지지 않으면 한국학 전공을 택하지도 않는다. 우수한 성적으로 학부를 나온 그들이 경제적으로 보다 유망한 법과대학이나 의과대학을 택하지 험난하기 짝이 없는 한국학자로의 길을 갈 이유가 없다. 하지만 장학금을 약속 받는다 해도 한국학을 공부해서 학문적 성취를 이룰 자신이 없으면 일찌감치 다른 길을 택한다. 이런 판단에 있어서도 영리하기 짝이 없는 친구들이다.  ‘한국어’라는, 세계 언어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언어의 장벽과 더불어 학위 논문을 지어낼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 지난하다는 사실을 알면 미련 없이 떠나가기 마련이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 CD-ROM을 통해 연구 성취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한국학 연구자로 남는다면 그것은 일 백만 달러의 장학기금 기부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럽 한국학 대회에서 만난 영국의 대학 교수 한 사람이 “조선왕조실록 CD-ROM을 만든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촛불을 켜놓겠다”고 한 것은 단지 우스갯소리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 CD-ROM이 자신의 한국사 연구에 도움이 되어서보다 제자를 유인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고 하는 점에 더 고마와했다.

  조선왕조실록 CD-ROM은 단지 400여권, 16만 페이지의 저작을 손바닥 크기의 디스크 세 장에 담아낸 간편성에 의해서만 이용되는 것이 아니다. 36만 개의 기사에 대해 모두 요약 정보를 작성하였으며, 그 기사 하나 하나에 대해 161개 주제에 의한 주제 분류가 행해졌다. 2억 자의 본문을 이루는 4천만 단어는 단 한 개의 누락도 없이 완벽하게 검색이 될 수 있다. 이 CD-ROM을 접한 외국의 한국학도들은 옛 한국인의 우수한 기록성에 한 번 놀라고, 그것을 현대 정보기술에 완벽하게 접목시킨 오늘의 한국인의 문화적 열의에 다시 감동했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 CD-ROM과 같이 한국학 연구의 기본이 되는 정보 데이터베이스에 대해서는 국내에서의 활용성 제고와 아울러 해외 한국학 진흥의 차원에서도 그 잠재적 역량을 극대화시키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국이 진출해 나아갈 세계 무대에서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앞장서 소개할 전령을 양성하는 길이며, 한국이라고 하는 나라의 네이션 브랜드를 확립하는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